위켄하이저는 눈을 뜬 순간, 자신이 멸망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부서져 내리는 하늘. 그 하얀 조각들. 그리고 그 파편 중 하나가 코 위에 툭 떨어져 녹고 나서야, 그는 눈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1년이 지나 겨울이었다. 위켄하이저는 그동안 이 세계를 연명하기 위해 열두 명의 리케트를 멸망 속에 밀어 넣었다. 한 명 당 한 달. 서늘할 정도로 정확하고 오차 없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이라는 시간을 넘긴다. 위켄하이저는 제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정원에 놓인 벤치는 그가 눕기에는 좁았고, 그는 몸을 한껏 구긴 채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잠깐만 정원을 구경한다는 게 벌써 이렇게 됐나. 깨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그는 잠시 멈추어섰다. 불편하지도 않은지 순한 낯으로 잠든 이는 그 흔한 잠버릇 하나 없었다. 위켄하이저의 변화를, 그가 말하기를 거부하기에 캐묻지는 못했으나 알고 있는 리케트는 고집을 부리는 일이 줄었다. 무엇을 하자 말해도 좋아요, 하며 속없이 웃기만 하였다. 이러다가 지친 위켄하이저가 그만 죽으라고 한다면 얌전히 제 목을 맬 만큼. 위켄하이저는 지쳐갔고 메말라갔다. 리케트는 점점 더 순하고 착해졌다. 어떻게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수많은 다른 그가 생각나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오답을 써낸 리케트는 울지 않으려 또다시 애를 썼다.
"일어나, 릿. 눈이 내리고 있어."
뺨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이 잠을 깨운 것인지, 아니면 다정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낸 것인지는 몰라도, 리케트는 눈을 떴다. 몇 번 눈꺼풀이 감겼다 떠지며 제 앞에 보이는 것을 파악한다. 그 역시 멸망이라 생각한 것인지 팽팽하게 당겨진 몸을 일으켜 위켄하이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끌어안고 멋대로 입을 맞춘다. 제 의견이란 것이 없는 사람 마냥 굴었던 근래의 나날 답지 않는 행동이었으나 위켄하이저는 묵인하고 용인했다. 그리고 숨이 모자랄 때가 되어서야 리케트의 몸을 밀어낸다.
"밀어내지 말아요. 위켄하이저. 사랑한다고 해줘요. 내가 당신의 마지막이라 해주세요. 나, 마지막 순간에는 그래도, 당신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줘요. 나밖에 선택지가 없어서여도 괜찮으니까. 이제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네?"
" … 진정해, 릿. 이건 눈이야."
심장마저 들어날 듯 절박하게 쏟아내는 말에, 위켄하이저는 그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멸망이 아님을 말해줄 수 있었다. 어느새 또다시 눈물자국을 그어내던 것이 멈춘다. 짐승마냥 품에 머리를 들이밀고 온기를 느끼며 위안을 찾는다. 머리를 파묻은 채 양 팔로 허리를 꾹 끌어안은 이로 인해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어갔다.
"안 볼 거야? 1년만에 보는 첫눈이잖아. 예전에는 어떻게든 나와 첫눈을 같이 보려고 기를 썼으면서."
그제야 리케트가 고개를 틀어 흩날리는 눈송이를 보았다.
"…첫눈을 함께 보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대요."
울음에 잠겨 먹먹한 목소리가 말을 낸다. 이제는 저 목소리가 한 점 불안 없이 밝아지면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흐릿했다. 자신이 건네준 꽃송이 하나에 그보다 더 기뻐할 수가 없을 만큼 환하게 웃던 이였는데. 그것이 생각이 나 발아래에 핀 푸른 꽃 한 송이를 꺾어 건넨다. 웃지만, 우울을 떨쳐내지 못해 예전과는 다르다. 위켄하이저의 그러한 시선을 느꼈는지, 다급히 표정을 피려고 애쓴다. 그것이 또 안쓰러워 위켄하이저는 시선을 거두었다.
눈이 하나 둘 쌓이며 정원 위로 하얀 눈이불을 만들었다. 그것은 위켄하이저의 머리카락 위에도 마찬가지라, 그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는 리케트를 달래며 몸을 일으키도록 이끌었다.
"이제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어."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나는 여전히, 당신만을 사랑해요……."
"알고 있어, 릿. 내가 너 말고 누구를 사랑하겠어."
너 이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는데. 라는 말은 삼켜진다. 그리고 영원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언젠가 그가 지치고, 리케트가 살면서 가장 많이 우는 날이 올 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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