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버스
2024. 10. 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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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몸이 얕게 흔들리는 감각과 함께 불현듯 꺼져있던 정신이 맞붙습니다.
아무래도 버스 안에서 깜빡 잠들어버렸던 모양이에요.
눈을 뜨면 들어오는 풍경은 익숙하고도 평범한 버스의 내부.
흔들리는 손잡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차창 너머의 풍경, 조금 낡은 감이 있는 앞 좌석의 시트….
익숙한 것투성이인 차체의 내부에서 익숙하지 않은 점이라고는 버스가 텅 비어있다는 점뿐입니다.
그야말로 '나 자신'을 제외한 탑승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왜일까요.
별로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적적한 버스를 오로지 시선만으로 훑고 있었을 때였나요.
문득 좌석의 맞은편 정면에 붙어있는 버스 번호 라벨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6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이 버스는 아무래도 종점까지 우회해서 가는 번호의 버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탑승객이 없을 법도 하지요.
불안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쯤 왔지?
그 전에 목적지가 어디였더라….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다 보면 문득 기대고 있던 차창 너머로 시선이 돌아갑니다.
흔들리는 창문 너머로 어느새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꼭, 세상을 수몰시킬 것처럼.
이 비는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걸까요?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제법 맑았던 것 같은데…
서유일:
지능
기준치:65/32/13
굴림:95
판정결과:실패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글쎄요, 정말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맑았던가요?
이상합니다.
머리가 무겁습니다.
막상 과거를 돌이켜 보려니, 제대로 기억나는 것들이 없는 것만 같아요.
희미한 두통이 몰려 옵니다.
덜컹.
어지러운 머리를 갈무리하기도 전에, 방지턱 탓인지 버스가 또 한 번 크게 흔들립니다.
그 불친절한 진동과 함께 품에 안고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75
판정결과:보통 성공
품에 안고 있던 무언가는 아무래도 국화꽃다발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군 충격 탓이었을까요?
순백색의 꽃잎 몇 송이가 바닥에 흐드러진 것이 보입니다.
서유일:(정신 붙잡고 떨어진 국화 꽃다발 주워든다.)
서유일:
듣기
기준치:70/35/14
굴림:88
판정결과:실패
바닥에 나뒹구는 꽃다발을 주워들던 그 순간, 단말마와 같은 이명이 짤막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죠?
어쩐지 머리가 아파옵니다.
아, 그제야 흐릿한 의식 너머로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그렇지.
오늘은 사랑했던 사람의 첫 번째 기일이었죠.
그러니 당신은 서이무가 잠들어있는 납골당으로 향하는 길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이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당신답지 않네요.
문득 버스는 인적이 드문 정류장에 정차합니다.
탑승구가 열리고, 올라타는 승객의 모습에 당신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 버스 위에 올라탄 사람은, …1년 전 죽었던 서이무였으니까요.
서유일:
SAN Roll
기준치:55/27/11
굴림:74
판정결과:실패
rolling 1d3
(
2
)
=
2
맞붙고, 멎습니다.
맞붙는 것은 허공 위로 겹쳐진 두 사람의 시선.
일순 멎는 것은 당신의 호흡.
그뿐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때로 꿈보다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요.
그렇기에 지금껏 비현실적인 현실을 여러 차례 맞이해가며 이토록 불친절하고 잔인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요.
비현실적인 현실이요.
서이무는 분명 1년 전에 죽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날, 돌이킬 수 없는 사고에 휘말려서요.
그래요.
나는 그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곁에 있어 주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의 부재를 부정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러니 내 앞에 서 있는 저 사람은, 서이무가 아니라, 단지 그를 지나치게 닮은 사람일 겁니다.
꿈보다 비현실적인 현실의 나날 속에서도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이 있는 법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잖아요.
혼란 속에 빠져있는 당신의 상태를 눈치챈 걸까요.
막 버스에 올라탄 서이무를 닮은 이는 당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이 앉아있는 좌석 옆에 앉습니다.
서이무: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저 웃는 얼굴.
저 목소리.
나를 향하는 다정한 두 눈동자.
아무리 부정하고 잊으려 애를 써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웠고, 그리웠기에 나날이 새로운 처절함과 아픔을 느끼게 했었던 저 두 눈처럼요.
정차했던 버스는 오로지 두 사람만을 태운 채,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 작합니다.
그 순간 당신은 받아들이고 맙니다.
서이무를 닮은 이는,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이 아닌 서이무 그 자체라는 사실을요.
당황했나요?
아니면 반가운가요?
혹은 슬픈가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가슴속에 응어리로 자리 잡습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혹여나 꿈에서라도 다시 만날까 준비해 두었던 말이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서이무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당신과 눈을 마주합니다.
서이무:어딜 가는 중이었어?
서유일:혀, 형…보러 납골당에, 가는 중이었는데…
형은 뭐야?
서이무:좋을 대로 생각해.
서유일:어떻게 돌아온건데? 응?
서이무:돌아왔다라... 그래, 돌아왔어. 네가 그리웠나봐.
서유일:…진짜 돌아온거 맞아?
서이무:불안해?
서유일:그야, 꿈에서나 생길법한 일이니까.
서이무:그렇다면 꽤 괜찮은 꿈이네.
서유일:정말 돌아온거 맞냐니까.
서이무:앞으로 너와 계속 같이 있어줄 거냐고 묻는 거라면, 그래, 맞아. 나는 여기에 있어.
서유일:…형이 없으니까 잠을 잘 못 자겠어.
같이 집에 갈 수 있어?
서이무:...그래, 그러자.
덜컹.
다시 한번 방지턱을 밟고 지나간 버스가 얕게 흔들립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14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얕은 진동 탓에 시야가 갈라짐과 동시에, 문득 운전석 쪽으로 시선이 꽂힙니다.
…이상합니다.
운전석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어야 할 버스 기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버스는 그저 운전사도 없이 홀로 비가 내리는 도로를 내달리고 있습니다.
서유일:
SAN Roll
기준치:53/26/10
굴림:77
판정결과:실패
서이무:하지만 유일아, 집에 가기 전에 가야할 곳이 있잖아.
네가 가기로 한 곳까지 길을 잃지 않도록 내가 동행할게.
짧게, 아까 전에 들렸던 이명이 다시금 귓가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서유일:어차피 형을 보러 가던 길이었는데, 이미 만났잖아. 그냥 돌아가면 안 돼?
서이무:(까닥,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가락이 제 다리를 툭툭 쳤다. 어디까지 숨기고 어디까지 말해야할지 가늠하는 듯이. 그리고, 한숨을 쉰다.) 안 된다고 말해도 너는 납득하지 못하겠지. 그래, 내가 거짓말을 했어. 그러니 이제 진실된 대답을 요구해. 그러고 나면 너도 받아들이게 될 테니까.
서유일:(순간 얼굴 구겼다. 제가 알던대로 끝까지 거짓말이나 하지.) …그럼, 언제까지 같이 있을 수 있는데?
서이무:네가 가기로 한 곳에 다다르면. 그때는 이 동행이 끝이 나겠지.
서유일:내가 버스에서 내리지 않으면?
서이무:형은 내릴 거야. 너 혼자 여기에 남게?
서유일:왜, 왜…? 형이 날 두고 가면 안 되는 거잖아…
서이무:나는 이미 널 한 번 두고 갔어. 두 번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마.
서유일:그러지 말고, 나랑 있자. 응? 혀엉… (네 손 꽉 쥐어잡는다.)
서이무:너와 함께 있기 위해서 왔어. 나 지금 여기 있잖아. (잡힌 손에 힘을 빼었다. 내뱉는 말이 느릿하다.)
서유일:아니 납골당까진… 너무 짧잖아. (꽉 쥔 손 끌어와 얼굴 묻었다.) ..내가 얼마나 보고싶어 했는지 알긴 해?
서이무:(닿는 살갗을 간지럽히듯 쓸었다. 기억하던 굴곡과 손에서 느껴져오는 생김새를 가만히 대조해보다가 결국에는 새삼스레 깨닫고 마는 것이다. 아, 내가 알던 그 애가 맞구나.) 무지하지.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네가 모르듯이.
서유일:(잠깐 닿는 손길이 그리도 포근해 눈커풀 내리감고 마구 부벼대더니.) 난 형이 죽을만큼 보고싶었는데, 단 하루도 형 생각을 빼먹은 적이 없는데. 형은 날 얼마나 그리워했어?
서이무:내가 할 수 있는 건 널 그리워하는 것 밖에 없었어. 어떤 말이 듣고 싶어? 형이 뭐라고 해야 네가 마음을 풀까...
서유일:…그냥 그리워했던 그만큼 안아줘. 같이 산책해주기랑 파스타 만들어주기 같은건 못할거 아냐.
서이무:못 본 새 어리광이 늘었네. 이리 와. (말과는 달리, 그는 손을 빼내 두 팔로 너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일정한 규칙성을 가진다.) 보고싶었어. 아주 많이. (툭, 머리를 맞대었다.)
서유일:나도, 형이 너무… (뒷말을 마저 뱉지 못하고 입을 다문건 참았던 울음이 터졌기 때문이렸다. 이러면 얼굴도 보이지 않겠다 끅 하며 작게 샌 소리는 금새 훌쩍임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꼴이라니, 그런 생각이나 하고 주먹 말아쥐었다.)
서이무:왜 울고 그래. 뭐가 그렇게 슬퍼. (몸을 뒤로 물리고는, 눈가를 쓸었다. 언제나와 같이 어린아이를 달래는 투다.) 이런 애를 혼자 두고 어떻게 갔지.
서유일:왜, 나 혼자 두고 갔어? 난 형 밖에 없는데… 너무하잖아. (물 먹은 목소리로 꿍얼 거렸다. 불평불만을 뱉듯. 눈썹 끝은 한껏 올라가 결국엔 네 가슴팍에 머리 콩 박는다.)
서이무:그래. 형이 잘못했어. 내가 너무했어. 미안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정리보다는 헤집음에 가까운 행위일 것이다. 우리의 해후가 그러하듯.) 간만에 만났는데, 형한테 이렇게 우는 모습만 보여줄 거야?
서유일:(품에 묻은 얼굴을 떼어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가 눈물만 보이면 미안한건 항상 저쪽이다. 그걸 아니까 몰래 몇 방울만 흘리려 했는데 들키고 나니 제 맘대로 되질 않으니 소매로 눈가 짓눌렀다.) 아니, 좋아서 그래. 반가워서…
서이무:천천히 추슬러.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시간이 많다, 라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남은 시간은 분명히 남아있다. 촉박할지라도 너를 재촉할 위인은 아니었으니, 짓무른 눈가를 다시금 살살 쓸기나 한다.)
서유일:(손길에 따라 귀는 작게 파닥인다. 숨 크게 들이쉬고, 뱉으며 눈을 마주한 낯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있다.) 형은 내가 얼마나 보고싶었길래 다시 날 보러 왔지?
서이무:네가 날 그리워한 모든 시간에 나 역시 너를 그리워하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서유일:차라리 되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형. 우리가 왜 이런 비틀린 방식으로 헤어져야 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되는건 아니잖아…
서이무:되돌아가더라도 같은 결말을 맞이할 거야.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나는 그 날 그 자리에 반드시 존재해야만 했어.
서유일:…왜? 알면서도 형은 다시 그 자리에 나갈거야? 나랑 같이 안있고?
서이무:...
자, 이제 내리자.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네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내가 바래다줄게.
그 말을 끝으로 버스는 곧 첫 번째 정류장에 정차합니다.
서유일:(삐쭉.) 내리기 싫은데…
서이무:내려야지. 가자.
형이 다 큰 애 안아들고 가야해?
서유일:(끙…) 아니… 그럼 조금만 있다가 가자~ 혀엉, 나 힘들어.
서이무:왜 힘들어. 어디 불편해?
서유일:마음이 힘들단 말이야.
서이무:그건 쉬면 괜찮아지는 게 아니잖아. (뺨을 잡아쥐고는, 짧은 입맞춤을 얼굴 곳곳에 남긴다.) 형이 어떻게 해줄까.
서유일:(요상하게 미간 좁히다 제 손 펴서 내민다.) 손 잡아줘. (가끔은 제가 굽혀야할 때도 있지 않겠냐며.)
서이무:그래, 그러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거기까지. 그는 억지로 너를 이끌고 일어나진 않았다. 가만히 기다릴 뿐.)
서유일:(살포시 손 맞잡자 몸 꾸물꾸물 일으켰다. 가기 싫다는 티는 내었으나 맞잡은 손 살짝 흔들고.) 가자.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은 협소한 간이정류장 지붕 아래로 들어섭니다.
빗줄기는 여전히 이 세상을 침수시킬 것만 같이 맹렬합니다.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처리된 정류장 지붕 아래, 양옆으로 담장 형식의 벽면이 기둥처럼 세워져 있고 그 중앙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나무 벤치가 하나 놓 여있습니다.
버스 그림이 새겨진 표지판 또한 눈에 띕니다.
서유일:(벽면이 눈에 들어온다. 살짝 눌러보고.)
마치 담장을 연상시키는 정류장의 벽면에는 흰색 장미 무더기가 덩굴을 내리고 자리합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70
판정결과:보통 성공
벽면 아래의 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당신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흰색 국화꽃입니다.
흙 속에 뿌리를 내린 채 한들한들 흔들리는 국화꽃은 물기를 머금은 탓에 아주 생생합니다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를 가르고 서이무가 말을 걸어옵니다.
서이무:국화꽃의 꽃말을 알고 있어?
빗줄기에 파묻힌 탓이었을까요.
그렇게 속삭이는 서이무의 목소리는 어쩐지 막연하고도 얕습니다.
서유일:
지능
기준치:65/32/13
굴림:87
판정결과:실패
글쎄요, 서이무의 질문에 답해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달리 없습니다.
서유일:…모르겠는데. 형은 알아?
서이무:감사함과 진실함. 내 기억이 맞다면.
하지만 국화는 색에 따라서도 그 의미가 달라지는 꽃이니까.
글쎄요, 국화꽃이 색상에 따라 꽃말이 상이하던가요?
처음 알게 된 사실인걸요.
서유일:
지능
기준치:65/32/13
굴림:28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어렴풋하게,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길래 다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요.
서이무: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네.
서이무는 그렇게 말하며 벤치에 앉습니다.
서유일:(슬쩍 따라 앉았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평범한 나무 벤치입니다.
지붕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주는 탓에 젖은 부분 없이 바짝 말라 있습니다.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벤치에 앉아 쉬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서유일:(주변 훑다 표지판 지긋 바라본다.)
간략한 버스 그림이 새겨진 정류장 표지판입니다.
표지판 아래 버스 노선도가 붙어있습니다.
아니, 이를 노선도라고 칭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버스 노선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노선도 대신 색상에 따른 국화꽃의 꽃말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맨 아래 적혀있는 국화꽃의 색상과 색상별 의미는 칠이 벗겨져 있어 읽을 수 없습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1
판정결과:대성공
칠이 벗겨진 자국을 통해 국화의 색상이 붉은색이라고 적혀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꽃말의 의미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19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벽면 상단에 고정되어있는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을 발견합니다.
여느 버스 정류장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전광판입니다.
전광판에는 글자가 흐르고 있지만, 약한 노이즈가 끼어있는 탓에 글자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9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전광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유일:
지능
기준치:65/32/13
굴림:92
판정결과:실패
당신은 막연히 떠올립니다.
하는 실없는 생각을요.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서유일:어, 음… (입으로 내뱉기 상당히 망설여지는 말이라 몇번 뻐끔이다가.) 서이무?
서이무:...음, 이건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서유일, 화났어?
왜, 였을까요.
나지막이 당신의 이름을 마주 부르는 서이무는 목소리는 어딘가 한구석, 차게 식은 빗물에 젖어 번지는 것만 같습니다.
서유일:
심리학
기준치:10/5/2
굴림:11
판정결과:실패
그의 표정을 읽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해본다면, 아마도... 우울일까요.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것 같고, 손에 잡았다고 한들 감히 위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우울입니다.
아주아주 방대한, 온 삶을 통틀어 몇 번 느껴본 적 없는.
무겁고도 강렬한 억겁의 우울이 빗소리에 잠식되어갑니다.
서유일:
지능
기준치:65/32/13
굴림:44
판정결과:보통 성공
그러고 보니, 서이무의 입술 바깥으로 터져 나온 '나'의 이름은 이번이 최초이지 않았던가요.
'서유일'이라는, 당신을 지칭하는 그 석 자 말이에요.
서이무는 버스에서 조우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으니까요.
무어라고 말을 건네기도 전에 장대비의 포화를 가르고 라이트가 번쩍입니다.
곧 버스 한 대가 정류장 앞에 정차합니다.
버스의 전면 유리창에 붙어있는 라벨에는 714번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서이무:가자.
서유일:어? 응… 아, 혹시 몰라서 말하는건데 나 화난거 아니다 형?
서이무:화났어도 별 수 없지.
서유일:에이, 진짜 아니라니까. 난 그냥 음… 맨날 형이라고만 불렀으니까.
애인 이름 못 부를 것도 없잖아?
서이무:또 그렇게 할 말 없게 만들지.
그래, 못 부를 것도 없지. 나도 화나지 않았으니까 더 변명하지 않아도 돼.
서유일:아니 변명이 아니라아, 끙… (앓고선 벤치에서 일어나 손 당긴다.) 가자며.
서이무:(순순히 네가 이끄는 대로 몸을 일으켰다. 버스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두 사람은 버스에 올라탑니다.
서유일:
듣기
기준치:70/35/14
굴림:67
판정결과:보통 성공
아까 전 들었던, 단말마와 같은 이명이 귓가를 울리고 사라집니다.
두 사람이 올라타는 것과 동시에 버스는 천천히 빗길 속을 뚫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버스는 첫 번째 버스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습니다.
이 안에 존재하는 탑승객은 오로지 당신과 서이무, 두 사람뿐입니다.
서유일:형 있잖아, …이 동행이 끝나면 형은 어디로 가?
서이무:글쎄. 출발하기 전에 자리에 앉아야지. 어디 앉고 싶어?
서유일:저어기, 맨 뒷자리?
서이무:그러자.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버스를 가로질러 맨 뒤에 자리한 곳으로 걸어갔다.)
서유일:(자리에 앉고 네 손 당긴다.) 근데- 나도 형 따라가면 안 돼?
서이무:지금 같이 가고 있잖아.
유일한 승객들이 자리에 앉으면, 버스는 부드럽게 출발합니다.
서유일:지금 말고, 무슨 말인지 알면서…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23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품에 안고 있던 국화가 일전보다 생기를 잃었습니다.
마냥 하얗던 꽃잎 끝이 짓밟힌 듯 옅게 시들어있습니다.
서이무: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서유일:그러게, 어떻게 살았더라.
아마 놀았을걸? 형 돈으로.
서이무:잘했네. 재미있게 놀았어?
서유일:…같이 놀 사람이 없잖아. 하나도 재미 없었어.
서이무:네가 왜 같이 놀 사람이 없어.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면서.
서유일:형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내가 뭐 아무랑이나 다 잘 노는줄 아나.
서이무: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서유일: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형 없으니까 재미 없어.
서이무:(네 머리 위로 제 것을 툭 기대었다.) 형 없으면 안 되겠네. (가벼운 목소리에 담긴 속이 시끄럽다. 숨을 마시는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서유일:형이 생각해도 그렇지. (다시금 품에 파고들어 꾸물거리며 두 팔로 감싸안아 네 허리 껴안는다.) 다른 사람은 없어도 돼.
서이무:그랬다간 후회할 텐데. 정말 없어도 되겠어?
서유일:그럼- 난 형만 있으면 돼.
서이무: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도 되려나?
서유일:형이 내 생의 주축이야. 그것도 몰라?
서이무:너 자신보다도?
서유일:…그럴지도 모르겠네.
서이무:그게 사랑인가봐.
나도 몰랐는데, 그게 사랑인 건가봐.
서유일:그럼 난 형을 무지 사랑하나봐. 죽을만큼.
서이무:그래, 그런가보다. 너무 사랑해서 이렇게 된 모양이야.
서유일:그런데 죽을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해? 형. 난, 이런적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
서이무:처음이면 배워가면 돼. 살아간다는 건 상실해간다는 거니까. 네가 잃는 건 내가 마지막이 아닐 테고.
그래도, 적당히만 사랑할 걸 그랬다. 그렇지?
서유일:왜 그렇게 슬펐는지, 하루종일 눈물만 나던 이유가 뭔지 이제 알 것 같은데… (몇 초, 조용히 하순 짓씹다.) 적당히 했으면 좀 덜 슬펐으려나.
서이무:울었어? 왜 혼자서 울고 그래. 달래줄 수도 없게. (그럴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말하는 목소리 기저에는 빗물이 깔렸다.) 아까 더 울게 놔둘 걸 그랬네.
서유일:조금? 아니 좀 많이… 여튼, 울만큼 울어서 이제 괜찮아졌나 했어. 난 분명 형을 놔준 줄 알았다? 근데 또… 막상 만나니까 못 놔주겠어. (팔을 풀고서 네 뺨 두 손으로 감싸 당겨온다.) 가지 마, 내 옆에 있어줘. (눈동자는 살짝 위로 향해 선명히 널 눈에 담으며 살며시 입술 포개온다.)
서이무:데리러 가는 건 늘 나였고, 맞이하러 나오는 건 늘 너였지. (숨결이 섞일 때까지 그는 가만히 있었다. 주행하는 버스 안이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흐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턱을 받쳐들고 고개를 트는 움직임은 느릿했다. 무엇을 하더라도 사라져가는 시간을 붙들 수는 없음을 알면서도.)
서유일:그렇게 해서 만나면 늘 함께였잖아. (비가 와서 그런건지, 오늘따라 체온은 평소보다 더 낮았으며 온기를 찾는 몸짓은 다급했다. 입을 맞추고 네 목을 끌어안으니 그제서야 짧게만 치던 숨 길게 뱉었다. 차라리 이대로 굳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인건지 놓아줄 생각은 한 치도 없는 듯 이리 가까운 거리에서 입 연다.) 형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거 다 아는데…
서이무:어린놈이 알긴 뭘 알아.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그는 놀리듯 굴 때마다 이런 표정으로, 이런 음성을 내었다. 지척에서 웃자 진동이 맞붙은 이들의 몸으로 번졌다.)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지.
서유일:…아니, 왜 그렇다고 안 해줘? (감싸안은 목 더 세게 끌어안고.) 놀리지 말고… 난 진지한데. (입 비죽이다 혀 내어 맞닿은 것 길게 핥았다.) 나랑 같이 있고 싶지 않냐고.
서이무:어디서 이런 것만 배워와선. (타박하는 것 같은 말과는 달리 그는 쉽사리 응하였다. 받치던 손으로 턱을 들어올리고, 입술을 맞붙였다. 혀를 내느라 생긴 틈새로 제 것을 밀어넣고 나서야 좁은 공간 안에 갇힌 온기, 익숙한 온도를 체감한다.)
서유일:누가 알려준건데, 다. (대충 형 보고 배웠지. 그런 말은 삼켜졌다. 입을 더 벌리고서 혓덩이 끼리 맞붙였다. 숨을 나누면 항상 제쪽의 숨이 부족했기에 나름대로의 대처였다. 같은 공간에서 닿아있으니 기분은 또 좋아지는지 꼬리는 가볍게 흔들리고 있더라.)
서이무:(속살이 쓸리고 엉기는 동안에도 그의 호흡은 평소보다 느렸다. 갈급하게 굴지 않는 태도로 천천히 맞붙고 맞물리며 이따금씩 받친 턱을 좀 더 밀어올렸다. 결국에는 뺨을 그러쥔다.)
서유일:(달뜬 숨을 뱉으며 온기를 나눠도 1년 전과 달리 안심하고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눈 한 번 깜빡이면 사라질 것 같은 눈 앞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유독 진득하게 눈을 떼지 못하고 그리운 얼굴에 머무르는 시선은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자세가 불편한지 바르작 대면서도 감아둔 팔은 더욱 단단히 고정했다.)
서이무:그만. (그대로 너를 뒤로 밀어 떼어내고는, 고인 타액을 목울대 너머로 넘겼다. 한숨을 쉬는 이의 낯에는 다시금 소위 우울이랄만한 것이 떠올라있었다.) 휩쓸리면 안 됐는데 내가 휩쓸렸어. ...쉬어. 잠깐 눈이라도 붙이거나.
서유일:(뒤로 밀리니 눈 깜빡이다 팔에 힘 풀고 눈 맞추며 고개 기울였다.) 혀엉, 왜… (네 상태 보더니 제가 더 죽상 되어 삐뚤게 하체만 정면 보고 앉아서.) 싫은데. 형만 보고 있을건데.
그렇게, 고집스럽게 쳐다보고 있다보면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날짜를 특정할 수 없는 그 언젠가의 평범하고 행복했던 기억.
당신의 옆에는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이 자리하고, 우리는 조용하고도 한적한 버스에 앉아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습니다.
상기해낸 평화로움도 잠시, 당신은 갑작스러운 서늘함을 느끼게 됩니다.
글쎄, 서늘함이라는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요.
모든 불안정한 감정이 한 데 뭉쳐 숨통을 억세게 짓누르던 그때.
빗길에 미끄러진 버스가 요동치듯 크게 흔들립니다.
무언가에 머리를 강하게 맞는 충격과 함께 일순 힘이 빠져나간 몸이 앞으로 쓰러집니다.
와락, 고꾸라지는 몸을 지탱하듯 누군가가 나를 강한 힘으로 끌어안습니다.
아니, '누군가'라고 특정 지을 필요도 없잖아요.
그야 지금 당신의 곁에 존재하는 사람은 서이무뿐인걸요.
서이무입니다.
서이무가 억센 힘으로 당신을 끌어안았습니다.
어째서?
그런 의문을 던지기도 전,
쾅―!
반대편 차선을 지나치던 트럭과 버스가 갑작스레 충돌합니다.
직후 들려오는 것은 커다란 굉음.
쇠가 굽어들고 절단되는 듯한 소름끼치는 금속음.
무언가 터지는 소리, 날아가는 소리, 어딘가에 들이박는 듯한 충격.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 나가는 듯한 생생한 통증.
품에 안고 있던 국화꽃다발이 바닥을 나뒹굴고, 마치 눈송이 같은 국화 꽃잎은 시야를 긋고 흐드러집니다.
나를 꽉 끌어안은 서이무의 체온은 어쩐지 전혀, 따뜻하지가 않아서.
그게 또 어쩐지 너무나도 슬퍼서…….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야속하게도 서이무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전에 시야가 수몰되고 맙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에 왈칵 쏟아집니다.
왜인지 생경하지 않은 순간입니다.
서유일:
듣기
기준치:70/35/14
굴림:38
판정결과:보통 성공
의식과 함께 낙하하는 머릿속에 이명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이명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지러운 의식을 잠재우듯 귓가에 익숙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섞여들던 탓입니다.
서이무:괜찮아.
…하고.
당신은 눈을 뜹니다.
제일 먼저 들려오는 것은 무겁게 낙수하는 물방울 소리.
그리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품 안에 안겨있는 백색의 국화꽃다발입니다.
꽃다발은 아까 전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시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시들면 안 될 텐데.
당신은 막연한 슬픔을 느낍니다.
그야 오늘을 위해 준비한 꽃다발인걸요.
서이무:깼어?
꼭 빗물에 익사할 것만 같이 무겁던 정신을 흔드는 것은 잔잔하고도 담담한 서이무의 목소리.
이곳은 버스 정류장인 것 같습니다.
꼭 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만 같이, 끊임없이 펼쳐진 도로 한가운데 마련된 간이 정류장입니다.
어느 틈에 하차한 걸까요.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서이무에게 기댄 채 잠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유일:혀, 형. 괜찮아? …괜찮은거 맞아?
서이무:뭐가? 왜,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서유일:방금 사고가… (찌푸리곤 얼굴 쓸어내린다.) 꿈이었나봐.
아까 전의 사고는 역시 꿈이었던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멀쩡할 수가 없을 테니, 아무래도 질 나쁜 꿈이라도 꾼 모양입니다.
서이무:피곤해 보여서 안 깨웠더니.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더 잘 거야?
자도 돼.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이무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있는 것만 같다는… 이유 모를 생각이 듭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11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여느 버스 정류장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전광판입니다.
전광판에는 글자가 흐르고 있습니다.
노이즈가 끼어있는 탓에 글자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첫 번째 정류장에서 보았던 전광판에 비해 노이즈가 덜합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91
판정결과:실패
당신은 첫 번째 정류장에서 서이무의 이름을 호명한 직후 버스가 도착했던 것을 떠올립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유일:
지능
기준치:65/32/13
굴림:93
판정결과:실패
버스 사고의 충격 탓이었을까요?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듭니 다.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버스에 다시 올라타고 싶지는 않다는 충동이 들어요.
서유일:(스을 눈치 보다가.) 잤다가 또 안좋은 꿈 꾸면 어떡해. 안잘래. 그보다 형, 만약 이대로 영영 버스가 안오면 어떡하지.
서이무:안 왔으면 좋겠어?
서유일:그럼 형이랑 같이 있을 수 있을거 아냐.
버스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당신을 서이무는 너무나도 슬픈 눈으로 바라봅니다.
서이무:서유일.
무겁게 허공을 가르는 서이무의 목소리는, 어째서 이만큼이나 빗물에 수몰될 듯 참담히 젖어있는지.
서이무가 당신의 이름을 호명하고 얼마 있지 않아 세 번째 버스가 저 멀리서 빗속을 헤치고 다가와 정차합니다.
버스는 지금까지 승차했던 버스와 달리 커다란 2층 버스입니다.
아, 실은 누가 상대를 호명하든 상관없었던 걸까요.
그래요.
달리 상관이 없었던 겁니다.
두 사람 앞에 멈춰선 버스의 탑승구가 입을 벌립니다.
타고 싶지 않아요.
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다는 근원 모를 충동만이 당신의 안에 가득합니다.
서유일:….형 우리 다음거, 다음거 탈래?
서이무:타기 싫어? 그래도 타야지...
서유일:안 타면 안 돼?
서이무:뭐가 그렇게 싫고 무서워.
괜찮아, 내가 같이 있잖아. 무서워할 거 없어.
서유일:난 형이 사라지는게 제일 무서워… 혀엉, 응?
서이무:같이 가자. 네 목적지까지, 같이 있어줄게.
서유일:목적지까지 갈 것도 없어. 난 여기에 형이랑 같이 있으면 돼.
서이무:목적지 없이 정체되기만 할 수는 없어. 세상에 영원한 게 뭐가 있겠어. 언젠가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야해.
내 동생, 언제까지 어린애로 남아있을 거야?
서유일:형. 난… 무서워. 성숙의 정도가 문제도 아냐, 난 그냥… 형이 없는 세상이 너무 두려워.
서이무:그래, 그러니 내가 먼저 버스에 올라타버린다면 너는 별 수 없이 따라오겠지. 내가 그러지 않는 것은... 그러게, 왜일까. 네가 너무 무서워하지 않길 바라는 거겠지.
서유일:우리 그냥 여기에 있자. 제발… 여기서도 충분히 행복할 거야. 날 위한다면 내 말을 들어주는 게 맞잖아.
서이무:세상 어떤 부모도 아이의 어리광을 전부 들어주며 키우지는 않아. 되려 그러는 쪽이 무관심한, 되다 만 것이겠지. 날 돼먹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 거야?
서유일:그게 아니잖아, 형… (맘에 안드는 듯 발로 바닥 치대다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서이무:(잠시간 일어난 이를 높아진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애처로운 연인을 당겨안았다.) 미안해. 다 괜찮을 거야.
서유일:괜찮긴 뭐가 괜찮아. 다 끝나면 형도 없을텐데. 그럼 난 또 어떻게 살라고, 내가 1년 간 어떻게 살아왔는데. (네 어깨에 고개 기대곤 중얼였다.)
서이무:(대답은 없었다. 네가 말하는 시간에 대해서도, 자신의 부재에 대해서도. 그가 내민 것은 짧은 한 마디 단어뿐이었다.) 가자.
서유일:…미워, 형 미워. 못됐어. (작게 말 뱉으며 버스에 오르다가, 뒤 흘긋 보고선.) 물론… 진심으로 밉다는 건 아냐.
서이무:진심이 아니면, 어떻게 미운데?
서유일:몰라, 그런거…! …형을 좋아하는 법 밖에 몰라서 어떻게 미워할지도 모르겠어.
서이무:그래, 그럼 천천히 알아가보자. 나를 어떻게 미워해야할지. 이번에도 내가 가르쳐줄게. (버스 안으로 발을 디디고는, 네게 손을 내밀었다. 이미 탄 이에게는 의미없는 손짓이겠지만.)
서유일:…형을 미워하면 다 괜찮아질까.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네 손 붙잡곤 꿈질거리더니 깍지 꼈다.) 가르쳐줘도 익힐 수 있을리가 없는데, 형 바보야?
서이무:내가 널 정말로 오냐오냐 키웠지.
서유일:날 사랑해서?
서이무:잘 아네. 바보 아닌 동생.
서유일:형은 바보가 맞아. 바보 멍청이…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44
판정결과:보통 성공
버스의 전면 유리창에 붙어있는 라벨에는 329번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서유일:
듣기
기준치:70/35/14
굴림:90
판정결과:실패
어쩐지 흐릿하게 이명을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빗소리 탓에 확신이 들지는 않지만요.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지
두 사람이 올라타는 것과 동시에 버스가 움직입니다.
차창 바깥으로 온통 습기뿐인 세계가 스쳐 지나갑니다.
버스는 지금까지의 버스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으며, 기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 존재하는 탑승객은 그저 당신과 서이무, 두 사람뿐입니다.
버스 내부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이지만, 입구가 닫혀있습니다.
닫혀있는 입구의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는 것이 보입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71
판정결과:보통 성공
당신은 품에 안고 있던 국화가 일전보다 훨씬 더 생기를 잃었음을 눈치챕니다.
갓 생명을 피워낸 듯 하얗고 투명하던 꽃잎은, 이제 그저 계절을 잃은 이름 모를 들꽃처럼 보여요.
단지 몇 송이의 국화만이 처량히 바래진 꽃잎의 색을 발할 뿐입니다.
서이무가 먼저 창가 좌석에 앉습니다.
세 번째 버스에 탑승한 뒤로 서이무는 어쩐지 멍한 상태를 유지하며, 지친 듯, 혹은 침체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서유일:형, 어디 아파? (옆자리에 슬쩍 앉곤 이마 위에 손 올린다.)
서이무:(시선이 느리게 따라붙는다.) 괜찮아. 왜, 너 어디 아파?
서유일:아니, 난 괜찮은데… 형이 힘겨워 보여서. 괜찮은거 맞아?
서이무:걱정시켰네. 괜찮은 거 맞아. 네가... 곁에 있잖아.
서유일:(어깨에 고개 툭 기댄다.) …힘들어지면 말 해줘야 해.
서이무:말하면 뭐해주려고?
서유일:아무것도 안 하고 형 옆에 딱 붙어있어야지.
서이무:그건 늘 하는 거 아니었어?
힘들지 않으면 안 해주게?
서유일:아냐 그게, 형이 힘들다 하면 버스에서도 안내릴 걸.
서이무:원래 내리기 싫어했으면서 핑계는. (네 콧잔등을 장난스레 쥐고 흔들었다. 숫제 제 키의 반도 안 오는 어린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서유일:읏, 형 진짜- (눈 꾹 감고 약하게 고개 젓고서.) 사람이 걱정 해주는데 지금! (몸 뒤로 빼 잡힌데서 빠져나왔다.) 씨이… 놀리기나 하고…
서이무:너는 네 걱정이나 해. 내가 열심히 네 걱정하면 뭐해? 정작 몸의 주인이라는 애가 이렇게 얼빠져있는데. 널 챙겨. 널 가장 우선시해.
서유일: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줄 알아. 자꾸 형이 신경 쓰이는데 어떡하라고. 돌아왔는데 어디 아플지도 모르잖아. 형이 제일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서이무:아냐. (네 말 끝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평소보다도 문장과 문장 사이의 틈이 길다.) 그래, 내가 더 잘했어야하는 거겠지. 네가 신경쓰지 않는만큼 내가...
서유일:…형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싸우긴 싫은데. (몸에 힘 빼고 좌석에 기대서 가까운 창가 주시했다.) 미안해 형, 내 걱정도 할테니까 형 걱정 하는걸로 뭐라 하지는 마.
서이무:싸우는 게 아니라 혼나는 거겠지. (지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는 낯을 하고서도 말을 정정했다. 이어진 사과에는 무어라 답을 하려다가, 결국 입을 가만히 다물었다.)
서유일:끙… 혼나기도 싫다고. 얼마만에 만난건데, 내가 걱정했다 해도 그래 고맙다 한 마디를 못 해 형은… (작게 투덜거리며 천천히 눈 내리감았다.)
서유일:
기준치:70/35/14
굴림:91
판정결과:실패
저멀리, 좌석 바닥에 책이 한 권 떨어져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서유일:(고개 빼꼼 내밀어 보다가 조용히 일어나선 다가가 책 주워든다.)
책이라기보다는 얇은 책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서유일:주마등…?
갑자기 강한 현기증이 몰려오더니,
의식이 암전합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맨 밑바닥의 어둠 속에서 당신은 환각을 마주합니다.
환각 속에 삶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가장 슬펐던 순간이,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라 여겼던 반짝이던 삶의 조각이, 어느 순간 그 삶에 뿌리를 내리고 침범한 서이무와의 첫 만남이.
…단 한 가지도 빼놓을 수 없는 여러 기억이 스쳐 지나갑니다.
함께 잠들고 일어났던 기억, 처음으로 그 앞에서 눈물을 터뜨렸던 기억, 고조되는 행복감에 웃어버렸던 순간.
한동안 빠른 속도로 영상이 스쳐 지나가고 잠시간 필름이 뚝 끊기며 말간 어둠이 지속됩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다시금 빛처럼 터져 나오는 영상이 하나.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서이무와 서유일,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차창 바깥으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 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없이 다정하며,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체온이 따스한 손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고즈넉한 빗소리의 향연마저 서로 간의 애정에 담뿍 물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쾅―!
반대편 차선을 지나치던 트럭과 버스가 갑작스레 충돌합니다.
직후 들려오는 것은 커다란 굉음.
쇠가 굽어들고 절단되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금속음.
무언가 터지는 소리, 날아가는 소리, 어딘가에 들이박는 듯한 충격.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 나가는 듯한 생생한 통증.
쉼 없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어두운 화면 사이로 그런 당신을 한 점 망설임 없이 끌어안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강한 힘으로 끌어안깁니다.
아니, '누군가'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의 곁에 사시사철 피어나는 국화처럼 존재하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늘 당신을 위해 노력했으며, 온 생애를 다해 열렬히 사랑해주었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야… 서이무가 아닙니까.
서이무입니다.
서이무가 억센 힘으로 서유일, 당신을 끌어안았습니다.
암전하는 버스의 내부를 어둡게 띄우며 필름이 또 한 차례 뚝 끊겨나갑니다.
떠오르는 영상의 날짜는… 1년 전의 오늘입니다.
아, 그제야 지금까지 서리가 내린 듯 희뿌옇기만 하던 기억 하나가 마치 퍼즐 조각처럼 달라붙습니다.
1년 전의 사고가 떠오릅니다.
1년 전, 돌이킬 수 없는 사고의 현장에 존재하던 것은 서이무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이무와 서유일 두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당신을 제외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던 그 참담한 사고의 현장에서, 서이무는 당신을 끌어안고 죽었습니다.
오로지 당신을 살리기 위해… 본인을 희생시켜서요.
이건… 주마등인가요?
그래요.
인생의 주마등 속에서 사고의 진상을 목격한 서유일,
서유일:
SAN Roll
기준치:52/26/10
굴림:32
판정결과:보통 성공
rolling 1d2
(
2
)
=
2
일순 강한 충격과 함께 주마등이 돌아가던 공간이 산산이 부서져 내립니다.
서유일:
듣기
기준치:70/35/14
굴림:7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무너져 내리는 공간 속에서, 조금은.
길게 이어지는 기계음을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꼭 말단부위부터 심장까지 강한 전기가 흘렀다 사라지는 것만 같은 감각.
이윽고 모든 것이 바닥까지 묵직하게 가라앉고 맙니다.
끊임없이 퍼붓는 빗소리에 한데 뒤엉켜있던 환각들 또한 함께 수몰됩니다.
귀를 먹먹히 침수시키는 낙수음.
당신은 흔들리는 버스 좌석에 앉은 채 눈을 뜹니다.
기억났습니다.
떠올렸습니다.
고개를 돌리면 서이무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곤히 잠들어있습니다.
덜컹.
버스가 방지턱을 밟고 흔들립니다.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에 맞춰, 짤그랑.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미약한 금속음이 들려옵니다.
서유일:…아 (바닥 확인한다.)
회전목마 고리가 달린 작은 열쇠입니다.
서유일:이게 왜… 형건가? (주워든다.)
서유일:
지능
기준치:65/32/13
굴림:1
판정결과:대성공
분명, 버스 2층의 출입구가 잠겨있었죠.
잠겨있는 곳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었으니, 아마도 그 열쇠일 겁니다.
서유일:그랬지… (서이무 잠시 흘긋 보고선 2층 출입구로 향한다.)
닫혀있는 입구의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는 것이 보입니다.
서유일:(열쇠고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 자물쇠에 끼워맞춰 본다.)
금속이 맞물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립니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차창에서 물기를 머금은 탁한 빛이 터져 나와 내부를 은은히 비추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책상과 책장, 그리고 침대 하나가 놓여있네요.
서유일:…버스에 이런 공간이 다 있네. (책상 훑는다.)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책상 위에는 그 흔한 필기도구도, 책도, 사용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월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흔한 먼지 하나 쌓여있지 않네요.
말끔하다 못해 쓸쓸해 보이는 책상 한가운데, 반으로 접혀 있는 쪽지만을 한 장 발견합니다.
서유일:(쪽지 펴본다.)
그러고보니 형이… (말 끝 흐리며 책장으로 시선 돌린다.)
책장에는 책이 한가득 꽂혀있지만, 그 어느 것도 당신이 읽을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검은색의 책등만이 마치 밤하늘처럼 빼곡히 즐비합니다.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73
판정결과:보통 성공
(고개 기울여서 보다가 작게 숨 내쉰다. 지금까지 제 이름이 두 번 불렸던가… 따위의 생각 하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꼭 병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병실용 침대입니다.
반쯤 처져있는 커튼 위로 핀이 꽂힌 명찰 하나가 매달려 있습니다.
명찰에는 서유일 님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문득 당신은 뼈를 치고 사라지는 기시감에 휩싸입니다.
빈 침대가 아니라는 듯, 느껴지는 미묘한 묵직함에 고개를 돌리면...
침대 주변으로 즐비한 온갖 의료 장치들… 그 사이에 푸른색 담요를 덮고 누워있는 사람은 입가에 산소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제야 당신은 형용할 수 없었던 기시감의 정체와 마주합니다.
당신이에요.
병상에 누운 채 갖가지 의료 기계들의 틈 사이에서, 산소 호흡기를 뒤집어쓰고 실낱같은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은… 서유일, 당신입니다.
서유일:
듣기
기준치:70/35/14
굴림:87
판정결과:실패
…이건, 이명인가요?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나요?
서유일:
관찰력
기준치:75/37/15
굴림:51
판정결과:보통 성공
병상 옆에 심전도 기록 장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록 장치의 모니터 위로 마치 미약한 파도 같은 당신의 심전도 곡선이 출력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마치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연약하고도 미약한 곡선입니다.
서유일:
지능
기준치:65/32/13
굴림:40
판정결과:보통 성공
지금까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던 수많은 이명, …아니.
심전도 기록 장치의 기계음을 떠올립니다.
이제야 확신합니다.
당신을 감싸 안고 죽어버린 서이무의 희생이 무색하게, 당신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버스는 무언가요.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서유일:
SAN Roll
기준치:50/25/10
굴림:77
판정결과:실패
rolling 1d4
(
3
)
=
3
믿을 수 없는 현실의 연속입니다.
아니, 이제 이건 현실이 아니겠지요.
영원한 안식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 있는 것은 바로 서유일, 당신입니다.
어쩐지 몸이 강하게 흔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에 눈을 감았다 뜨면, 흐릿하고 침침한 시야 너머로 희기만 한 천장이 들어옵니다.
벨이 터지는 소리, 장치에서 갈라져 나오는 다급한 기계음 소리, 위급한 환자의 위치를 알리는 병원의 방송 소리,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뭉개지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당신은, 다시 눈을 감습니다.
쏴아아.
고요하고 적막하게 수몰하는 세상을 울리는 빗소리.
낙수하는 빗물은 봄의 끝물에 삶을 모두 피워내고 낙화하는 벚꽃을 닮았습니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에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정류장입니다.
품에 안고 있는 국화꽃은 이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시들어 있습니다.
서이무:일어났어?
귓가에 내려앉는 다정한 목소리.
서이무에게 기댄 채 잠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아주 자연스럽게도, 정류장의 상단에 자리하고 있는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까지의 전광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의 노이즈도 끼어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온전히 모든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
전광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래요.
그랬던 겁니다.
이름을 불러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서이무였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서이무가 각 정류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호명했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러고 보면, 꼭 서이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뒤에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던가요.
그야 당연하잖아요.
저 메시지에 따르면… 인도자는 서이무.
인도를 받을 자는, 망자의 길에 들어선 자.
죽음의 여로에서 가장 먼저 버스에 올라타 있던 자.
바로 당신입니다.
그렇지만 왜일까요.
한참이 흘러도 서이무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제, 이걸로 마지막일 텐데요.
당신은 첫 번째 버스에서 조우한 직후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서이무의 표정을 마주합니다.
그는… 기뻐 보입니다.
동시에 슬퍼 보입니다.
한편으로 어딘지 홀가분해 보이는 눈으로 당신을 봅니다.
서이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펼친 우산을 당신에게로 기울입니다.
서이무의 어깨가 젖어 듭니다.
그제야 그가 입고 있는 옷차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색채 하나 없이 새카만 정장.
꼭, 세상이 말하는 인도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산을 당신에게 기울인 채 처연히 떨어지는 비를 맞던 서이무는 나지막이 입술을 엽니다.
다정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릅니다.
서이무:좋은 밤이야, 내 사랑.
그렇게 속삭인 서이무는 문득 당신에게로 손을 내밉니다.
사방은 어느새 컴컴해져 있습니다.
서이무:목적지가 바뀌었어.
처음에 했던 말 기억 나?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네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내가 바래다주겠다고 했잖아.
건너편 정류장으로 넘어가자. 네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
그는 당신에게 손을 내밉니다.
서유일:무슨 소리야 형… 목적지가 왜 바뀌어? (내밀어진 손 위에 제 손 얹곤 올려다봤다.)
서이무:널 다시 삶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얹어진 손을 깍지껴 잡고, 발걸음을 떼었다. 그가 말한, 건너편 정류장을 향하여.)
서유일:왜, 왜. 난 죽었잖아. 형이랑 같이 가는 거 아니야? (한층 다급해진 목소리로 네 뒷모습에 질문 던진다.)
서이무:도와준 신이 있어. 도와주기로 했어. 널 다시 돌려보내 주기로.
안 올 거야?
서유일:(발걸음이 느려지다 우뚝 멈춰 섰다.) …그럼 형은?
서이무:네 걱정만 하라고 했지.
서유일:형이 없을 내가 걱정된단 말이야. 지금까진 누워있었지만, 돌아가면 진짜… 형 없이 살아야 하잖아. 난 그럴 자신이 없어 형…
서이무:해보지도 않고 못 하겠다고? 형이 너 그렇게 키웠어? 계속 이렇게 말 안 들을 거야?
서유일:형이… 형이 뭘 알아! 난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난… 난 왜 살렸어…? 형은 날, 그정도로 사랑했어?
서이무:...그래, 사랑했어.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것들이야. 내가 널 적당히 사랑하지 못했어. 그래서 내가 아닌 너를 살렸어.
서유일:왜 그랬어… 난, 혼자 남는게 제일 무섭단 말이야. 왜 나한텐 형을 살릴 기회따위도 주어지지 않았던 걸까. 불공평 하잖아… 이대론 돌아가봤자야.
서이무:되돌아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다만 그때는 반사적인 것이었고, 지금 다시 한다면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되겠지. 그래, 솔직히 말할게. 너를 내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줄은 몰랐어. 닥치고 나서야 알았지. 하지만, 내 사랑, 여기 서있는 걸 그걸 아는 나야.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사람이야.
그러니까, 안 돼. 져줄 생각 없어. 형 말 들어.
서유일:날 데리러 왔다며. 그럼 같이, 같이 가야하잖아. 매일 그랬잖아. 돌아가면, 너무 오래 자서 이젠 잠도 안올텐데. 그럼 난… (다시금 눈물이 삐져나와 팔 들어올려 벅벅 닦아낸다.) 형 아니면 데리러 올 사람도 없는데… 너무해. 아니, …(마지막일 거라는 느낌이 들어 이런 말은 더이상 하기 싫어 입 다물었다. 대신 무겁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네 쪽으로 향했다.) 있잖아, 나도 형을 내 삶에서 평생 지우지 못 할 정도로 사랑해. 그러니까 내가 진 것도 아니고… 헝이 이긴 것도 아냐.
서이무:데리러 왔었지. 쓸데없는 짓을 한 건가, 이럴 거면 차라리 한 번에 죽게 놔주는 편이 널 위한 것이었을까 수없이 고민하면서. 하지만 지금 이 기회는 널 감쌌기 때문에 얻어진 거야. 그러니까, 네가 가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는 건 내 희생을 쓸모없는 것 취급하며 길바닥에 내던지는 거나 다름없어. (젖은 눈가를 쓰는 손길은 어느덧 평소와 같아져있었다. 더는 억지로 시간을 늘리듯 느릿한 손짓이 아니었다.) 형한테 그럴 거야?
서유일:…말을 안들을 수도 없게 만들어 놓고 물어보면 뭐해. (그에 따라 평소와 같이 네 손을 겹쳐잡고 제 뺨에 부비는 것이다.) 형,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그때까지도 사랑할까. 일단 난 그럴 생각인데.
서이무:본인을 감싸안고 죽은 사람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따라붙는 것은 낮은 웃음소리다.) 지금 뭘 묻는 건지 알고나 있어? 의심할 걸 의심해야지.
서유일:그런 소리는 좀 안할 수 없나.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 줄도 모르지… (큰 손에 얼굴 파묻었다. 잠시라도 온기 더 나누려는 듯 웅얼인다.) …마지막으로 물어보는건데, 우리 같이 가면 안 될까 형…
서이무:안 돼. (단호히 나온 거절 뒤에는, 자조 어린 혼잣말이 따라붙었다.) 어린애랑 붙어먹으려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남은 손마저도 네 뺨에 가져다대고는, 네 얼굴을 감싼 채로 들어올렸다. 눈을 마주한다.) 그래도 이렇게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이런 건 각오한 적이 없어서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지네. 답지 않게. 가서는 울지 마. 다른 놈이 달래주게 두지도 말고.
서유일:…(비죽 입 내밀고서 얼굴 쏙 빼내 네 허리 끌어안았다.) 그럼 나도 싫어. 내가 다른 사람이랑 노는 것도 별로 안좋아 하면서 왜 놔줘? 그럴거면 형이 책임지고 데리고 다녀. 형, 내가 죽고 사는 건 중요한게 아냐. 만난 김에, 이대로 그냥 쭉 같이 있으면… 그럼 좋잖아. 그래서 진짜 마지막으로 부탁하는건데, 내 이름 좀 불러주라 형… 만나고나서 두 번 밖에 못들었어. 정말 마지막 부탁이야…
서이무: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은. (검지 끝으로 네 이마를 누르고는 꾹 밀어냈다.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세 번째 정류장에서부터 내내 그는 웃고 있었다.) 왜, 내 사랑이라는 호칭은 마음에 안 들어? 사랑 받고 싶은 거 아니었나.
그래, 너는 늘 내 말을 안 들었지. 정 다른 놈과 놀아나고 싶으면 잠깐은 그래도 돼. 어차피 나에게 되돌아오고 나면, 너는 분명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될 테니까.
서유일:허락 안해줘도 되는데, 아니 허락 해주지 마. 그런거… (잠깐 밀려났다가 다시 꼭 붙었다.) 사랑하는 애인 말 좀들어주라 혀엉. 응? 아직 쌓아갈 추억이 많은데 우리, 같이 가도 되잖아. 같이 가. 병원에서 일어나면 반겨줄 사람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저기로 돌아가. 있잖아 형. 여기서 헤어지면 형이랑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느낌이라 그래… (살짝 떨리는 것 같기도 한 몸은 끌어안아 맞잡은 제 손을 더욱 단단히 했다.) 그러니까 형이 이름 불러줄 때까지 내 발론 안 움직여… 알아서 해.
서이무:네가 정 억지로 끌려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지금 온갖 좋은 말로 달래주고 있잖아. 왜 계속 고집을 부려. 이건 어리다고 봐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그제서야 다시금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옅게 깔렸다. 이마를 매만지며 한숨을 쉰다.) 네 목숨이 달려있어. 근거 없는 불안 따위에 매몰되어 졸라댈 사안이 아니라고. 네 이름을 내가 부르면 죽어. 눈치챘을 텐데? 그렇게 눈치 없는 애 아니잖아, 너.
서유일:이건, 고집 같은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게… (제 자신도 이게 고집이 아니면 뭔지 잘 모르겠어서 입술만 짓씹었다. 하나 제 마음은 고집 같은 것이 아닌데. 와중에 들리는 한숨 소리에 흠칫 떨리는 것은 익숙한 반사반응 같은 것이었다.) 알아. 아는데, 지금 기뻐하면서 돌아가지도 못 하겠어. 내가 죽을 운명이란 걸 깨달았을때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해야하나. 혼자 돌아가야한다는 생각보단 편했어. 형…
서이무:너는 지금 내 목숨까지 같이 내버리고 있는 거야. 알고 말하는 거 맞아? 너를 살려보내기 위해 내가 바친 모든 걸, 지금 네가 단 한 줌의 가치도 없는 무용지물한 쓰레기로 만들고 있어. 기어이 내가 그 날 널 감싸안았던 것을 쓸데없고 무가치한 짓으로 만들어야겠어? 내가 쓸모없는 짓을 한 거야? 그래?
서유일:아니 난, 그게 아니라! … (아, 억울하다. 제 바람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그뿐인데. 설움이 밀려와 한순간 눈물 왈칵 쏟아냈다. 저를 돌려보내려고만 하는 연인이 밉다. 아니, 사실 밉지는 않지만… 그러하다 치자. 주먹 꽉 쥐었다가 천천히 네게서 떨어졌다. 보이는 낯은 분명 구겨져서 추할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자리 피하듯 네가 향하던 방향으로 먼저 걸음 빠르게 옮겼다.)
서이무:(네가 제게 뒷모습을 보인 일이 있었던가. 너는 보통 맞이했고, 마주보았으며, 웃었다. 그러지 못하도록 삶으로 떠밀어보내고 울린 것은 자신이었다. 알면서도 그의 낯에는 일말의 후회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잠시 멈추어서서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을 영원히 그리기 위해 기억하는 이처럼.
누구도 만나지 못할 것을 안다. 알기에 선심 쓰듯 풀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죽어 사라진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사랑했고 완벽했던 연인으로 박제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기만 할 추억을 알았다. 나는 너의 이상향으로 남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될 것임을 안다.
그제서야 넓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은 건너편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발끝을 적시는 빗물은 기실 뜨거운지도, 차가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잖아요.
내가 지금 집중해야 할 존재는 단 한 사람뿐인걸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요.
문득 서이무의 어깨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는 전광판이 보입니다.
전광판의 메시지는 우리가 원래 앉아있던 반대편 정류장의 전광판 메시지와 그 내용이 상이합니다.
서이무:이제, 네가 내 이름을 불러야 할 차례야.
이제는 반대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당신이 서이무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서유일:(멍하니 전광판을 본다. 그러다 비가 쏟아지는 허공도 본다. 툭, 툭. 지붕이 있어 마른 바닥에 자국을 남기는 것은 제 눈물일지도, 빗물일지도 모른다. 한참 망설였다. 그리고 뱉은 말은…) …형, 우리 다시 건너편으로 돌아가자. 난 다시 못 돌아가. 왜 나만, 내가 하는 것만 고집 부리는 거야. 형도 나랑 다를게 없잖아…
서이무:(제가 네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그만이듯, 너 역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그만임을 안다. 여기서 더 밀어붙인다고 해서 너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뒤를 향해 구둣발을 디딘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턱을 타고 흘러 물방울로 맺힌다. 그는 천천히 한 쪽 다리를 굽히고, 이어 남은 쪽마저도 땅에 대었다. 물이 고인 바닥에 닿은 천은 빠르게 젖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젖은 천이 척척하게 다리에 감긴다.) 부탁이야. (쏟아지는 빗속에서 무릎을 꿇은 남자가, 생에 처음으로 부탁을 입에 내었다. 제 어린 연인을 살리기 위해서.)
서유일:(제 옆의 형체가 몸을 숙인다. 이내 점점 내려가 바닥에 붙은 건, 살아 생전에도 누군가에게 숙여본적 없을 법한 사람이라 어쩐지 더욱 슬퍼서 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제 사랑하는 연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니 어찌 그걸 모른체 할까. 아까부터 말아쥐고 있던 주먹 안은 짓눌린 손톱 자국으로 가득했으나 왜인지 그것보단 왼쪽 가슴이 형용할 수 없을만큼 죄여와 답답한 숨을 뱉고나서야 한껏 굽힌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자박자박, 몇 걸음 떼서 쪼그려 앉아 네가 기울여줬던 그 우산을 다시 네 손에 들려줬다.) …안 추워? (팔 뻗어 네 목 끌어안았다.) 이제 비 맞고 다니지 마. 서이무. …형, 아까 짜증낸 건 미안해.
당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서이무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람이 붑니다.
온전히 침체된 죽음의 여로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가 젖어듭니다.
바람이 이렇게 세차게 불면, 우산도 소용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닌 빗물일 거예요.
얼마 있지 않아 정류장 앞에 라이트를 켠 버스가 한 대 정차합니다.
버스의 번호는, 424번
버스의 출입구가 열립니다.
서이무:(몸을 일으켜세우고 지탱하는 다리가 무겁다. 제가 일어나는 바람에 매달린 꼴이 되어버린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다. 눈물졌던 눈가에, 곧잘 쥐곤 했던 뺨에, 장난쳤던 콧잔등에, 수없이 맞물렸던 입술에. 제가 사랑했던 모든 것에게 작별을 고한다.) 잘 가. 내 사랑, 내 연인, 내 동생.
서유일:(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닿은 것도 얼마만인가, 하나 이것도 잠시 뿐이란게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닿아오는 입술은 달기만 하니 어떻게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울까. 제가 과거에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미래에도 사랑 하고 있을 제 연인을 두고 걸음을 재촉하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붙잡듯 제 고개가 따라가 다시 한 번 길게 입을 맞췄다.) …우린 꼭 다시 만날거야. 형, 그때까지 잘 지내. 기다리고 있어야 해. …헤어지기 전에 사랑한다고 좀 해줄래?
서이무:기다릴게.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마지막에. 우리가 다시 만날 때로 아껴두자. 우리의 끝이 다가올 때, 우리가 마주하고 웃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에, 우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단어로... (머리를 맞댄 이들의 색과 결이 다른 머리카락이 섞여든다.) ...기다릴게.
서유일:잠깐, …잠깐 헤어지는 거지. 그렇지 형? 다음엔 형이 마중 나오겠네. (팔을 풀고 물 먹은 걸음을 뗀다. 한발 두발 내딛은 발은 버스 위로 올라탄다. 목적지를 향해.) 많이 보고싶을 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와볼게. 형이 싫어도 그럴거야.
당신이 버스에 올라타면 버스의 문이 닫힙니다.
당신은 급하게 뒷좌석으로 내달립니다.
창문을 열고, 우산을 든 채 당신을 올려다보는 서이무와 두 눈을 마주합니다.
서이무:안녕, 사랑했어.
그렇게 속삭이는 서이무에게 무어라고 답을 건네기도 전에 버스는 움직입니다.
수몰되는 세계에서, 수몰될 듯 슬프기만 한 버스가 빗길을 가르고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당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버스 안.
이 주체 못 할 슬픔을 어떻게 견뎌내라는 걸까요.
이제 옆 자리에 더는 그 사람이 없는데, 그가 없는 삶 속에서 나는 억겁 같은 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야 할 텐데… 이 슬픔을 어떻게 씻어내야 한다는 말인가요.
넘쳐흐르는 슬픔에 턱 끝에 맺힌 눈물을 훔쳐냅니다.
뺨 위로 번지는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냅니다.
입술 바깥으로 침잠되어있던 고통이 터집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다시 만나기 전의 수많은 시간을 버텨내며 나는 아주 많이, 당신이 보고 싶을 겁니다.
눈물에 흠뻑 젖어든 소매는 하얗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환자복 차림입니다.
무겁게 내려간 고개에, 품에 안겨있던 국화 꽃잎 위로 시선이 떨어집니다.
까맣게 시들어있던 국화는 물기를 머금어 생생합니다.
다시 피어난 겁니다.
나의 삶을 향해 되돌아가는 이 버스 안에서 말이에요.
국화는, 붉습니다.
이제 더는 흰 국화가 아닌 붉은 국화예요.
떠올랐나요?
붉은 국화의 꽃말은,
당신은 품 한가득 국화꽃다발을 끌어안습니다.
그 위에 호흡을 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냅니다.
익숙하고도 적막한 빗소리, 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기계음에 눈꺼풀을 들어올립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흰 천장.
소독약 냄새.
밝은 빛.
아, 바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서이무가 인도해준 나의 목적지입니다.
놀란 간호사의 목소리, 커튼을 치고 급히 들어서는 의사의 얼굴.
난잡하게 흩어지는 내 삶의 빛.
네가 없는 너의 기일.
내가 살아 돌아온 비 내리는 밤의 병실.
눈가에 고여 있는 뜨거운 물기 탓에 눈이 아픕니다.
가슴에 담기 벅차고, 감은 눈 아래 떠올리기 힘들고, 그 삶이 짧았기에 찬란했고 슬픈 이름이 있습니다.
안녕, 형.
안녕, 서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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